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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인권위원회 진정내용(납북피해자)
  • 작성일
  •   :  2011-03-15
     

    국가인권위원회 진정내용(납북피해자) : 최성용 등 7명


    인권침해 범죄의 가해자(피진정인) 김정일의 경력 및 지위


       가해자(피진정인) 김정일(金正日, Kim Jong Il)은 1941년 2월 16일 러시아연방공화국 하바로프스크州 브야츠크에서 전(前) 북한 주석 김일성의 자로 출생하여 1964년 김일성 종합대학 졸업하고, 같은 해 1964년 노동당 중앙위원회 조직지도부 지도원으로 출발하여, 1967년 당 선전선동부 과장(25세), 70년 당 선전선동부 부부장(28세), 1972년 빨치산 원로모임 후계장 내정, 1973년 당 중앙위 조직비서 겸 지도부장, 선전선동 담당 비서, 3대혁명소조운동 총책임자(31세), 1974년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에서 정치위원으로 선출됨, 후계자 공식 천명(32세), 1975년 공화국 영웅칭호 (33세), 1980년 당 정치국 상무위원, 당 군사위원, 당 비서국 비서(38세), 1982년 최고인민회의 제 7기 대의원(공화국 영웅 칭호), 1986년 최고인민회의 제 8기 대의원(44세), 1990년 국방위원회 제1부위원장, 최고인민회의 제9기 대의원, 1991년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 등극 (49세), 1992년 공화국 원수 칭호 (50세), 1993년 조선국방위원회 위원장 취임(51세), 1994년 김일성 사망 시 장의위원장(52세), 1997년 조선노동당 총비서, 1998년 ‘김일성 헌법’으로 헌법을 개정한 이후 이 헌법에 근거 공화국 최고지도자인 조선국방위원회 위원장 재추대, 최고인민회의 제 10기 대의원(56세), 2003년 최고인민회의 제 11기 1차 회의에서 국방위원장으로 재추대(61세), 2009년 최고인민회의 제12기 대의원으로 재추대되는 등의 경력을 가지고, 현재 북한 국방위원회 위원장, 조선 노동당 총비서,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의 직책을 가지고 사실상 지방정권인 북한지역을 1인 독재체제로 통치하는 자이다.


    진정사실(가해행위) 


       가해자 김정일은 북한의 최고통치자로서 자신의 지휘․감독하에 있는 성명불상의 자들에 대한 지시 등을 통해 이들과 공모 공동하여 피해자에게 아래와 같이 인권을 침해하는 범죄를 저질렀다.

       가해자 김정일이 지휘하는 북한당국은 휴전협정 이래 487명의 남한 주민을 납치한 후 이들의 원 거주지인 대한민국으로 되돌려 보내지 않음으로써 국제법규에 위반하여 피해자들을 감금하거나 신체적 자유를 박탈하는 행위를 해 오고 있다. 

       강제납북은 인도에 반하는 죄로서 국제법의 근본규칙에 위반한 구금 또는 신체적 자유의 중대한 박탈, 강제적 이동에 해당하여 북에 억류되어 있는 기간동안에는 노예화, 살해등의 죄에 해당한다.


    추가 진정사실


      진정인들의 가족들은 북한 당국으로부터 강제납북당하여 북한에 억류되었으나, 피진정인 대한민국 정부(법무부, 외교통상부, 통일부)는 피해자가 북한에서 당한 고통(반인륜적 범죄로 시효가 없음)에 대하여 이를 조사하지도 않고 피해를 예방하고 구제할 아무런 법적, 외교적, 사실적 노력을 하지 않고 있는바, 피해자의 위와 같은 상황은 피진정인이 대한민국의 영토내에 있는 우리 국민과 재외국민에 대한 보호의무, 특히 북한당국으로부터 인권침해를 당한 국민과 동포의 보호와 권리구제를 소홀히 하는 차별적 처사에 기인한 것이므로, 현재도 고통받고 있는 피해자들을 위해 대한민국 정부가 수사, 실태조사, 국제공조 등을 통해 인권침해의 방지와 처벌, 피해구제를 위해 다양한 최선의 조치를 강구할 것을 진정하는 것이다.


    1. 진정인 최성용(납북피해자 최원모의 아들)


       납북피해자 최원모는 평북 정주에서 출생하여 오산학교를 중퇴하고 정주군에서 어업에 종사하다 6·25 전쟁이 발발하자 치안대를 이끌며 공산군에 맞섰다. 1950년 11월 평안북도에 진격했던 유엔군이 중공군의 개입으로 퇴각하게 되자, 최원모는 당시 오산학교 출신들이 주축이 돼 창설한 유격대인 백마부대에 합류했다.

     6·25 전쟁 당시 유격백마부대는 서해 도서(島嶼) 지역을 오가며 유격전을 펼쳐 북한군 3000여명을 사살하고, 중공군 600여명을 포로로 잡는 전과를 올렸다. 군번 없는 유격대로 참전한 백마부대원들은 552명이 전사했다. 최원모는 유격백마부대에서 유일한 동력선인 40t급 북진호(北進號)의 함장을 맡았다. 북진호는 보급과 포로 수송, 부대원과 민간인 대피 등을 담당했다. 한봉덕(83) 유격백마부대 전우회장은 최원모와 북진호가 없었다면 도서 지역에서의 유격전은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회고했다. 최원모는 전쟁이 끝난 뒤 1954년 충남 서천으로 내려가 피란민 거주지역에 터를 잡고, 배 세척을 모는 선주(船主)가 됐다. 그는 1967년 6월 4일 풍복호를 몰고 선원 7명과 함께 연평도 부근에서 조기잡이를 하던 중 1967년 6월 5일 08:00경 북한 경비정 10여척에 포위돼 총격을 받고 납북됐다. 다른 선원 5명은 풀려났지만 최원모는 유격백마부대에서 활동한 전력(前歷)이 드러나 다른 선원 2명과 함께 북한에 억류됐다. 진정인이 최근 확보한 정부 기록에는 (최원모가) 6·25 전쟁 당시 남하하면서 원적지에서 좌익분자를 살해한 것이 발각돼 억류됨이라고 적혀 있다. 이후 최원모의 행적은 알 수가 없다. 진정인이 귀환 납북어부나 탈북자 등을 통해 들은 바로는 그의 부친은 1970년쯤 처형당했다고 한다.


    2. 진정인 이연순(납북피해자 안승운의 처)

      

       1995. 7. 9. 조선족 자치주인 엔벤(延邊)의 주도(州都)인 엔지(延吉) 노상에서 아파트를 구하고 있던 진정인의 남편인 목사 안승운(安承運 ; 진정인과 1973년경 혼인, 1945. 5. 10.생)을 공작원 이경춘 등 3명을 동원하여 택시로 유인․납치하여 강제로 북한에 데려간 후 지금까지 송환거부는 물론, 그 유인납치의 사실이나 생존 여부 및 소재지 등에 대한 정보제공을 거부하고 있다.

       그 경위를 상술하면,

       납북피해자 안승운은 1990년경부터 여의도 순복음교회에서 혼자서 중국으로 파송되어 선교활동을 하다가 1992년 목사 안수를 받고 엔지에서 가족과 함께 생활하기 위한 아파트를 구하던 중 1995. 7. 9. 평소 안면이 있던 이경춘 일행 3명에게 유인되어 택시를 함께 타고 간 후 소식이 없다.

       피해자는 평소 북한에 교회 100개를 세우겠다고 말할 만큼 북한 선교에 열정이 많았고, 북한을 드나드는 조선족들에게 쪽복음(손바닥 만한 크기의 작은 성경책)을 설탕을 동봉하여 교부해 주고 교육시켜 북한에 보내기도 하였다.

       납치 직후인 1995. 7. 24. 북한 중앙통신은 “기독교 목사인 안승운씨가 모종의 임무를 띠고 중국 연변지역에 파견돼 활동하던 중 망명했다”고 보도했고, 다음날인 7. 25. 북한 중앙 TV에는 피해자가 기차에서 내려 꽃다발을 받으며 환영받는 모습이 방영됐으며, 며칠 뒤인 8. 1. 피해자는 대남 라디오 방송인 평양방송에 출연해 “안기부원들이 나에게 설교할 때 ‘중국의 인권문제를 제기해야 중국이 해방되고, 북한 사람들을 포섭해서 데리고 나와야 된다’고 강요해 입북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피해자가 의거입북했다는 북한 당국의 주장과 달리 그가 강제로 납치됐다는 사실은 중국 정부에 의해 확인됐다. 1996. 7.경 중국 지린성(吉林省) 법원은 ‘불법감금 및 불법출경죄’를 적용해서 이경춘에 대해 징역 2년의 실형을 선고했고, 이경춘은 형기가 만료된 1997. 7. 28. 북한으로 강제추방되었던 것이다. 그 후 피해자가 평양 봉수교회에서 북한의 꼭두각시로서 사목활동을 하고 있다는 것은 평양을 방문한 해외교포들에 의해 확인되었다. 그가 납치된 지 한 달쯤 뒤 평양을 방문했던 한 교포는 ‘안 목사가 주민들에게 인사말을 하면서 안기부의 등쌀에 못 이겨 의거입북했다고 말했으나, 그 모습이 너무 어색해 북한 측이 써준 것을 읽는 것으로 보였다’고 말했으며, 또한 ‘안 목사가 예배과정에서 몇 차례에 걸쳐 울고 있는 것을 보았다’고 이 교포는 전했으며, 북한을 자주 드나드는 한 재미교포에게 ‘돌아가고 싶다’는 뜻을 직접 비치기도 하였다(월간조선 2005년 2월호, 월간조선 2006년 7월호 각 참조). 또 "2004년 탈북한 문기남 전 북한 축구대표팀 감독은 '1997년쯤 안 목사와 한 호텔에서 함께 머문 적이 있는데, 안 목사는 멍한 표정으로 허공을 바라보곤 했다'고 전했다. 그 이후에도 피해자는 2~3년 동안 북한 TV 방송에 연설하는 모습 등이 방영됐으나, 통일부에 따르면 2000년대 이후 안 목사가 북한 TV에 나온 적은 없었고, 그 후 피해자가 자살했다는 소문이 돌고 있으나(조선일보 2010. 3. 10.자), 북한은 일체 피해자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지 않고 있다. 그로 인하여 피해자의 처인 진정인 이연순은 물론, 1남 안상엽, 2녀 안소연, 3녀 안지연은 극심한 정신적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3. 진정인 황인철(납북피해자 황원의 아들)


    가. 납북피해자의 신원

     이름 : 황 원

     성별(여성 또는 남성) : 남성

     생년월일 : 1937년9월12일

     국적 : 대한민국

     직업 : MBC PD

     사회활동(정치, 종교, 노동조합, 인도적 단체, 언론, 기타) : 언론

      당시 거주지 또는 직장주소 : 강릉시 홍제동

      피해자의 사망여부 : 생사확인 불가


    나. 피해내용

       1969년12월11일 강릉발 김포행 국내선 YS-11기가 이륙 후 10분만에 강릉 상공에서 북한의 고정간첩 조창희에 의하여 강제로 납북을 당하였다. 당시 탑승객은 승무원과 승객 총50명(간첩1명 제외)이었다. 1970년2월14일 승객39명만 송환하였다. 미귀환자는 승무원 4명, 승객7명으로 총 11인이었다.

    납치한 후 4시간 이상의 사상교육을 시켰고 황원씨의 이론적인 답변을 못 마땅하게 여겨 2주 동안 어디론가 끌고가 협박, 고문을 하였다. 2주뒤인 1970년 정월 초하루에 고향을 그리워하며 ‘가고파’ 노래를 부른다고 어디론가 끌고 나간 후 영영 보이지 않았다. 그 후 2001년 제3차 이산가족 상봉에서 KAL납북으로 강제억류된 성경희(당시 스튜어디스)씨가 본인의 어머니인 이00씨와 상봉을 하였다. 모녀의 상봉에서 성경희씨는 같이 납북당한 정경숙(당시 스튜어디스)씨 또한 같은 동네에서 잘 살고 있으며 자신의 아이들이 이모로 부르며 잘 살고 있다고 증언해 주었다. 그러나 2006년 6월 대한적십자사를 통하여 북한은 ‘생사확인 불가’라는 통지서를 보내주었다. 마찬가지도 같은 날 동년동월에 나의 부친인 황 원씨도 “생사확인 불가‘ 내용의 통지서를 받았다. 하지만 2008년 12월에 자수간첩 오길남씨는 황원씨가 1986년 ’구국의 소리‘ 방송에서 보았다고 증언해 주었다.

       북한이 대한민국 국민을 강제납치하여 송환하지 않는 것은 인도주의에도 반하고 더욱이 이들의 생사조차 가족들에게 알려주지 않는 것은 비인륜적이며 인류역사에 커다란 죄악을 짓고 있는 처사이다. 북한당국은 이제라도 지난날의 과오를 속죄하기 위해서라도 납북하여 귀환시키지 않은 11명을 하루빨리 송환하여야 한다.

       피해자들의 송환을 위하여 우리 가족들과 민간단체에서는 유엔인권이사회에 까지 강제적․비자발적 실종문제를 제기하는 등 갖은 노력을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 정부는 피해자는 물론이거니와 그 가족들이 겪고 있는 인권침해에 대하여 적극적인 조치를 강구하여야 함에도 피해자들의 송환노력에 미온적이었고, 피해가족들이 호소에도 소극적으로 대응하였다. 또한 12년 동안 관련 부처의 납북자전담과가 없이 납북자들을 특수이산가족으로 분류하여 이산가족과에서 관리하여 정책과 행정업무를 처리하여 뚜렷하게 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는 결국 대한민국 정부(통일부, 외교통상부 등)가 대한민국의 영토내에 있는 우리 국민에 대한 보호의무를 소홀히 하여 인권침해가 계속되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진정인은 대한민국정부가 신속한 구제조치를 마련해 주기를 바란다.


    4. 진정인 김정희(납북피해자 김경두의 딸)


       1968. 6. 6. 시간불상경 인천 옹진군 연평면 소재 연평도 인근 앞바다에서 ‘부길호’를 타고 어로작업 중이던 진정인의 아버지 기관장 김경두(1935. 11. 26.생)를 비롯하여 함께 어로작업 중이던 선장, 부선장, 부기관장 등 선원들을 북한경비정이 납치하여 강제로 북한에 데려간 후 지금까지 송환거부는 물론, 2006년경 남북 이산가족 상봉 당시, 신청이 당첨되어 큰 기대를 가지고 기다렸는데, 북한 당국에서는 아버지 김경두의 존재에 대해서 “확인불가”라는 통지를 해오는 등 납치 사실이나 생존 여부 및 소재지 등에 대한 정보제공을 거부하고 있다.

       그 경위를 상술하면,

       진정인은 북한에 의해 납북된 부길호 기관장 김경두(일명 김인철이라고 불림)의 딸로서 현재 어머니 박00(73세)와 함께 살고 있습니다. 아버지는 진정인을 무척 예뻐하였고, “이번에 마지막으로 배를 타겠다.”고 하고선 어로작업을 나갔는데, 그것이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납치사건 발생 후, 진정인은 경찰 2명으로부터 아버지인 김경두씨가 납북되었다는 소식을 통보받았는데, 당시 진정인은 8살이었다. 이후 진정인은 약 19살까지 경찰 등 국가기관으로부터 감시를 당하였고, 20살 이후에도 취업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이러한 고통은 진정인만 당한 것이 아니라 할아버지의 4촌들까지 소위 연좌제에 걸렸던 것이다. TV를 사거나 남동생이 군대에서 휴가를 나오거나 마치 간첩을 다루듯 항상 감시를 당하였기 때문에 이로 인한 정신적, 경제적 피해는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납북되기 전인 1950 - 1960년대 아버지 김경두씨는 웬만한 기계에는 능통하였기 때문에 전기발전기 기사, 선박 기관장 등을 하였고 외국어에도 능통하였다. 아버지는 군대에서 하사관으로 근무(상사로 전역)하면서 여러 가지 기술자격증을 따기도 하였다. 그 당시에는 국가적으로 전기가 대단히 부족한 상황이었고 발전기 기술이 있는 전문가가 턱없이 부족하였기 때문에 발전기가 고장이 나면 어김없이 아버지를 찾았다. 동네 사람들과 경찰들은 북한에서도 아버지의 기술이 많이 필요하기 때문에 아마도 북한은 아버지의 기술을 많이 부려먹고, 아버지의 기술 때문에 북한이 절대로 한국으로 안 보내 줄 것이라는 얘기를 많이 하였다.

       북한에 의해 강제로 납북된 사람들 중 아버지와 함께 부길호를 타고 어로작업 중 납치된 사람들로서 한국으로 귀환한 사람은 없고, 부길호 선원 한 사람의 아내가 자식 둘을 데리고 귀환을 한 사실이 있는데, 그 분을 만나서 아버지의 생사여부 등을 확인한 적이 있었다. 아버지의 사진을 보여주면서 아버지를 본 적이 있는지를 물어보았으나 본 적이 없다는 얘기만 들었다. 아버지의 키가 176 cm 정도로 큰 편이라 눈에 잘 띄기 때문에 만약에 생존한다면 분명히 봤을 것으로 예상되는데, 본 적이 없다는 것이다. 북한에서는 2~3년에 한 번씩 납치된 사람들을 상대로 지역별 교육장소에서 집합 교육을 실시하고 있는데, 거기서 본 적이 없다고 하였으며, 이후에 다른 귀환자들 7명에게도 사진을 보여주며 물어보았으나, 모두 본적이 없다고 하면서, 아버지가 기술이 좋으니까, “아마도 북한에서 부당한 대우는 상대적으로 적게 받으면서 지냈을 것이다. 고생이 심하지는 않을 것이다.”라고 위로의 말을 하였다. 한편, 남북 이산가족 상봉이 있어 신청 결과 당첨이 되어 큰 기대를 가지고 기다렸는데, 북한 당국에서는 아버지의 존재에 대해서 “확인불가”라는 통지를 해 와서 망연자실한 적이 있다.

       아버지의 납치로 인하여 어머니와 딸인 김정희는 평생을 극심한 정신적 고통을 겪고 있으며, 그 고통은 현재도 진행중이다.


    5. 진정인 허용근(납북피해자 허용호, 허정수의 친척)


       1975년 8월 8일 동해에서 어로작업중이던 납북피해자 허용호(당시 25세), 허정수(당시 21세) 등 선원 33명이 오징어잡이 배 천왕호를 북한경비정을 이용해 나포한 후 위 선원들을 상대로 약 1년간 강원도 원산 62연락소에서 이른바 '적응 교육'과 '정치 학습'을 한 후 피해자들의 귀환요구 및 그 가족들의 송환 요구에 불응하고 있다.


    6. 진정인 김필선(납북피해자 최장근의 처)


       납북피해자 최장근(당시 36세)이 1977. 5. 10. 16:30 경 경남 삼천포 근해에서 통영군청 소속 어로지도선 통영호(선장 김선두, 당시 39세)에 탑승하여 조업지도를 하던 중 소형어선으로 가장한 북한무장간첩선 2척을 발견하고 정지를 명하였으나 이에 불응하므로 추격하여 검색하기 위해 1척에 올라탔을 때, 북한무장공작원들이 우리 어로지도선 통영호에 총격을 가하면서 대전차 로케트를 발사하고 수류탄을 던져 통영호를 파괴하고 피해자를 납치하여 북한으로 도주하게 한 후 납치의 사실이나 생존 여부 및 소재지 등에 대한 정보제공을 거부하고 있다.


    7. 진정인 김양자(납북피해자 김석만의 누나)


       납북피해자 김석만은 1946. 9. 23. 경남 고성군 월평리에서 부 김한호와 모 김삼이 사이에 1남 6녀의 외동아들로 출생하였다. 김석만은 월평리에서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졸업하고 농사일을 하다가 3년간 군복무를 마친 후 한 때 부산 가야에서 제과점을 경영하기도 하였다. 김석만은 1972년경 안양수산 기관장으로 근무하던 고종사촌 형 박봉만의 소개로 안양수산 소속 고깃배에 탑승하게 되었다. 김석만은 1972. 2. 27. 부산항에서 안양36호에 탑승하여 동해로 조업 나갔다가 북한에 나포되었다. 그 후 가족들은 김석만의 생사를 모르고 지냈다. 그러다가 1973. 11. 대영호를 타고 서해안에서 조업중 피납되었다가 2003. 4. 19. 두만강을 건너 탈북한 김병도씨를 통해 김석만이 생존 사실을 확인하였다. 김병도씨에 의하면 납북자들이 3개월 동안 함께 교육을 받은 적이 있는데, 그때 김석만도 함께 교육을 받았다고 확인해 주었다. 그 이후 김석만에 대해서는 더 이상 생사를 확인하지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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