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초청 발제문 >

한국사회의 청렴성과 국가지도층의 역할
-국정지배구조개선과 이를 위한 세 가지 운동을 제안하면서-

              이 석 연(李石淵, 변호사,「헌법포럼」 대표, 「시변」공동대표)

1. 지도층의 청렴성과 사명의식이 국가유지의 기본이다.

 (1) 조선왕조는 백성들이 초근목피(草根木皮)로 연명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가난한 나라였습니다. 그렇게 가난한 왕조가 500년이라는 장구한 세월 동안 단일왕조의 기틀을 유지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인가? 한마디로 국가기강이 무너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국가기강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도덕적 용기를 갖춘 언관이나 사관(史官)들의 직언과 정승을 비롯한 권력핵심층의 청렴성이었다고 봅니다(역사학자 신봉승).
  한 조사에 따르면 조선왕조 500년 동안 황희, 맹사성 등 218명의 청백리가 배출되었으며 그 중 정승급이 34명이고, 오늘날 이권 내지 권력 부서로 볼 수 있는 재정경제부에 해당하는 호조(戶曹)를 선두로 건설교통부격인 공조(工曹), 검찰 내지 법무부에 해당하는 형조(刑曹) 순으로 청백리가 많았다고 합니다(중앙일보 1998. 10. 15.). 여기서 청백리라 함은 뇌물을 받지 않았다거나 부패하지 않았다는 것 이상의 한 나라를 일정한 경륜을 가지고 이끌어 갈 수 있는 능력을 지닌 공직자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비록 하위직이나 지방관서에서는 시대에 따라 부정부패가 심했다 하더라도 권력핵심층의 청빈함과 공직에 대한 헌신적 태도가 정권에 대한 불만을 잠재우고 국가(왕조)의 기틀을 유지한 것입니다. 한마디로 국가 내지 사회지도층의 '참 선비'로서의 기개와 의리 즉 「노블리제 오블리즈」의 정신이 조선조에 의연히 살아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처럼 국가지도층의 청렴성과 사명의식은 국가기강과 진운에 결정적 역할을 하게 됩니다.

  (2) 이에 비하면 오늘날의 고위공직자 내지 국가지도층의 청렴성이나 국가와 공동체에 대한 소명의식은 아직도 부끄러운 수준입니다. '나는 예외일 것이다'. 또는 '내 경우는 양해될 것이다' 라는 법치와 원칙의 부재 내지 은연중에 나타나는 특권의식의 넘침은 우리가 어떤 면에서는 아직도 '원칙국가'의 틀을 세우지 못하고 그만 그만한 수준에 머물고 있는 주 요인이 아닌가 합니다.
  대한민국 건국 이후 역대 정권의 출범때마다 부정부패 척결과 개혁을 부르짖지 않는 정권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정권의 후반기로 접어들면서 그러한 주장은 공허한 것임이 들어나곤 했습니다. 현정권 역시 지금까지 지켜볼 때 예외일 수 없습니다. 정치권력형 부패의 척결 없이 개혁과 국가청렴도의 향상은 기대할 수 없습니다. 하위공직자와 민간부분의 부패방지도 강조되어야 하겠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권력핵심층의 청렴성 제고와 헌법과 법률에 따른 정도(正道) 국정경영이라는 법치의식의 확립입니다.

 2. 이제 국정지배구조가 개선되어야 할 때이다

 (1) 그동안 정부와 시민단체는 기업에 대하여 기업지배구조개선을 요구하면서 기업경영의 투명성과 사회적 책임을 강조해 왔습니다. 주주대표소송제, 집중투표제, 사외이사제, 출자총액제한제도, 증권관련집단소송제 등이 도입되어 소액주주의 권익보호와 투명경영, 구조조정을 통한 군살빼기(downsizing)가 상당부분 달성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제는 기업경영의 투명성, 책임성요구에 못지 않게 국정운영과정에서의 헌법 · 법률적합성과 투명성, 책임성 더 나아가 국정운영의 경제적 효율성을 강조할 시점이 되었다고 봅니다. 즉 기업지배구조개선(corporate governence)에 상응한 국정지배구조개선(government governance)이 요구됩니다.

  (2) 국정지배구조 개선의 요체는 먼저 권력을 담당하고 있는 각 주체가 헌법과 법률이 정한 권한에 맞게 그 기능을 수행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대통령을 정점으로 한 우리 사회의 권력집중현상을 개선하여 기업의 소액주주에 해당하는 국민이 주권자로서의 제 역할을 하는 구조로 바꾸는 것입니다. 제왕적 대통령제는 우리 헌법 구조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헌법과 법률이 정한 권한과 절차를 무시하고 역대 대통령과 그 측근들이 권력을 행사한 데서 비롯된 것입니다.
  저는 오늘의 한국 사회가 겪고 있는 경제적 어려움, 정치 · 사회적 갈등과 국가정체성의 위기 등의 근본원인도 권력행사과정에서의 국가지도층의 헌법과 법률의 위반 내지 경시에 있다고 봅니다.

 (3) 국정지배구조개선 요구의 두 번째 핵심은 정부 스스로 군살빼기를 통하여 국정운영의 경제성과 효율성을 기하는데 있습니다. 기업과 국민에 대해서는 구조조정과 군살빼기를 통한 규모의 경제를 강조하면서 정작 정부는 복지, 평등이라는 이름하에 방만한 국정운영으로 국가재정을 악화시키고 있습니다. 현정부는 임기 전반기에만 해도 장차관급 22자리를 비롯하여 공무원 수를 무려 23,000명이나 늘렸습니다. 반면 국민은 유래 없는 조세부담으로 허리가 휘청거리고 있습니다. 정치적 고려가 우선된 정부의 방만한 재정운영으로 국민들은 정체불명의 조세와 부담금에 시달리면서 우리가 소중히 생각하는 개인의 자유인 재산권이 서서히 그리고 조용히 상실되어 가는 조세국가적 위기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전도된 현실은 이제 바로 잡혀져야 합니다.

 3. 기록남기기, 판공비 폐지, 납세자소송법제정 운동을 제안한다

  저는 이 기회를 빌려 정부와 시민사회에 고위공직자들의 국정운영에 있어서의 투명성과 책임성 및 적법절차의 준수를 담보하기 위한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운동(법률제정)을 제안합니다.

 (1) 첫째, 기록남기기 운동의 전개입니다.
  기업의 경영실적이 투명하게 공개되어야 하듯 모든 공적조직에서는 그 권한행사를 모두 기록하고 그 기록을 보존, 공개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는 주권자인 국민에 대한 최소한의 의무이기도 합니다. 우리의 경우 선조들에게 부끄러울 정도로 권력행사과정에 대한 공적인 기록이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는 기록부실공화국의 반열에 서 있습니다. 예컨대 대형국책사업만 하더라도 그 추진배경, 결정주체 등에 관한 회의록 등 기록이 전무하여 사후에 그 책임소재를 따지기가 어렵습니다. 각종 국정현안에 대해서 누가 어떤 권한을 어떻게 행사했는지를 명백히 기록으로 남겨 놓음으로써 숨어서 권한을 남용하는 행태를 없애야 합니다.
  대면결재를 금지하고 모든 문서를 전자결재로 통일시켜야 합니다. 전자결재를 하게 되면 사후에 문서를 조작한다거나 의도적으로 문서를 파기하는 등의 비리는 최소한 막을 수 있습니다. 이와 더불어 장관급 이상 고위공직자의 집무실에서의 대화와 전화통화는 모두 녹음해서 보존했다가 일정기간 경과 후 공개하는 방법도 필요하다고 봅니다. 이것이 투명행정, 책임행정의 지름길이자 공무원에 대한 책임을 추궁할 수 있는 전제가 됩니다. 이를 위한 관련 법률의 제, 개정 특히 전자결제법 제정의 필요성이 시급합니다.

  (2) 둘째, 판공비폐지에 관한 법률제정운동입니다.
  장관이나 공기업의 장, 지방자치 단체장 등 각종 기관장들이 한 해 쓰는 수천만원에서 수억원에 이르는 각종 판공비는 그 내역이 불투명한 기관장의 비자금에 불과합니다. 무슨 이유로 공금을 자기 돈 쓰듯 먹고, 마시는 데 쓰는 것인지 국민적 설득력이 전혀 없습니다. 명목상 판공비뿐만 아니라 온갖 명목으로 숨겨져 있는 판공비는 선진 외국의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시대착오적인 것으로 폐지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정치 문화적 풍토에서 공직이나 공기업 기관장 자리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온갖 작태의 하나가 봉급의 몇 배, 몇십 배에 달하는 판공비란 잿밥의 마력도 그 한몫을 하고 있습니다.
  우선 청와대부터 판공비를 없애야 합니다. 그러면 다른 정부기관도 따를 것이고 결국 민간기업의 비자금조성관행과 분식회계도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물론 국가원수의 정당한 업무수행에 필요한 돈은 예산의 범위 내에서 얼마든지 투명하게 집행할 수 있습니다.
  오랜 관행으로 자리 잡은 판공비를 예산편성 때 없애는 것이 사실상 어려운 점을 감안하여 판공비를 폐지하는 특별법을 제정할 필요가 있습니다. 대신 판공비에 쓰는 예산을 공무원의 봉급으로 편입시켜 생활비로 돌려주어야 합니다. 다만 직원들이 경조사를 당한 경우 등 기관운영비가 필요하다면 일정액을 기관예산으로 편성하여 그 용도로 사용하면 됩니다. 당장 판공비를 폐지할 수 없다면 그 사용내역을 사용한 다음날 그 기관의 인터넷 홈페이지에 공개하도록 해야 합니다.

  (3) 셋째, 국민대표소송법 내지 납세자소송법 제정의 필요성입니다.
  권력담당자들의 책임의식을 고취하고 정책결정과정의 공정성과 투명성을 확보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로서 고위정책결정자들의 잘못(고의, 과실)으로 예산이 낭비되거나 권한의 남용 등으로 국가나 개인에게 손해를 끼쳤을 때에는 국민이 직접 소송의 당사자가 되어 그 책임을 물을 수 있는 「납세자소송법」의 제정이 속히 이루어져야 합니다. 현행 법제상 정략적 고려에 의한 국책사업 추진 결정, 선심행정 · 즉흥행정 등으로 인한 예산 낭비, 현저한 권한남용행위 등에 대하여 납세자인 국민이 직접 책임을 추궁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전무합니다(지방자치법상 지방자치단체장의 책임을 묻는 주민소송이 불완전한 형태로 있기는 하나 중요한 건 국정운영에 대한 국민의 책임추궁임). 납세자인 국민의 입장에서는 행정의 투명성과 책임성은 기업의 투명경영과 책임경영 못지않게 중요한 문제입니다.
  정책판단의 잘못 등에 대하여는 책임을 물을 수 없다거나 사법적 판단에 적합하지 않다는 것이 마치 확립된 이론인 것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는 권력행사과정의 투명성과 책임성의 확보라는 헌법적 요청에 우선하지 못합니다. 정책결정과 집행과정이 다양하고 일률적인 잣대로 판단하기 어렵다 하더라도 권한행사과정의 기록이 투명하게 남아 있는 한 법률로 유형화하여 책임추궁을 하는 것은 가능하고 또 필요한 일이기도 합니다.